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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느와르 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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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ELLO
댓글 0건 조회 1,187회 작성일 24-05-17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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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대전콜걸 두 얼굴] ​시시한 논쟁 - 버트란드 러셀(6)​러셀은 이론적으로는 20세기 여성 해방 운동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적으로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장수한 여왕이 서거했을 때 러셀의 나이는 서른이었다—에 뿌리를 내린 채로 남아 있었고, 여자를 남자의 부속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 투표권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도라가 쓴 글이다. “버티는 사실은 여성과 남서잉 평등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그는 남자의 지능이 여자의 지능보다 우수하다고 믿었다. 언젠가 그는 내게 여자들은 말로 깎아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의 주된 기능은 남편을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듯하다. 그는 2남 1녀를 뒀는데, 이따금은 아이들에게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가 떠받는 셸리처럼 아이들에게 평소에는 무관심을, 그리고 간헐적으로는 맹렬한 소유욕을 보여 줬다. 도라는 그가 “자신의 역할을 아이들의 문제에서 벗어나 세계의 정세에만 완전히 국한시켜 버렸다”고 불평했다. 러셀 자신도 “부모로서는 실패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유명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식과 아내를 포함한) 사람들은 러셀의 사상의 몸종, 현실적으로는 러셀의 자아의 몸종이 돼 가는 경향이 있었다. 러셀은 어떤 면에서는 점잖고 상냥하고 교양 있으며, 관대함으로 이타적인 제스처를 보여 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르크스, 톨스토이, 입센이 보여 줬던 철저한 자기 몰입이 그에게는 부족했다. 그렇지만 착취적인 성향은 있었다.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는 특히 그랬다. ​​랠프 쇤먼이라는 흥미로운 사례가 보여 주듯, 러셀이 여자들만 착취했던 것은 아니었다. 쇤먼은 미국인으로 프린스턴과 런던경제대학을 졸업한 철학도였다. 1958년에 CND에 합류한 그는 2년 후 스물네 살 때 시민불복종 운동 세력을 조직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러셀에게 편지를 썼다. 흥미가 생긴 늙은 러셀은 쇤먼에게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격려했고, 쇤먼이 유쾌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쇤먼의 극단적 사상은 러셀 자신의 사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톨스토이와 체르트코프의 관계와 무척이나 흡사했다. 쇤먼은 러셀의 비서 겸 조직책이 됐고, 1960년경에는 사실상 예언자—왕의 궁전에서 수상 노릇을 했다. 러셀에게는 궁전이 2개 있었다. 하나는 러셀의 정치적 활동의 중심지인 런던에 있었고, 다른 대전콜걸 하나는 노스웨일스의 포트메이리온 반도에 있는 플라스 펜린 저택이었다. 포트메이리온은 주변 지역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한 부유한 좌파 건축가 클러프 윌리엄스-엘리스 경에 의해 세워진 환상적인 이탈리아식 마을이었다. 존 스트레이치의 여동생인 윌리엄스-엘리스의 아내 아마벨은 스탈린의 걸출한 변명자로, 1930년대의 암울한 시기에 등장한 대단히 혐오스러운 문건 중 하나인(현재는 노예 노동으로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 백해 운하 건설과 관련한 선전 선동 서적의 저자이기도 하다. 러셀의 전기 작가 크로셰이-윌리엄스, 아서 케스틀러, 험프리 슬레이터, 호전적인 과학자 P. M. S. 블레킷 경과 경제사학자 M. M. 포스탠 같은 많은 유복한 진보주의자들이 이 아름다운 지방에 정착해 삶을 즐기면서 사회주의 천년 왕국을 계획했다. 러셀은 그들의 군주였으며, 지방의 중산층 인텔리겐치아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 순례자들이 러셀의 지혜와 동의를 구하려고 러셀의 궁전을 찾아왔다. 한때 그들의 선조들이 야스나야 폴라냐의 톨스토이에게 그런 것을 구했듯이 말이다. ​러셀은 지나치게 널리 홍보된 그의 런던 진출을 즐겼다. 그는 연설을 하러, 시위하고 체포당하러, 기존 권력을 희롱하러 런던에 진출했다. 그런데 그는 웨일스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따라서 돈도 받지 않으면서 헌신적이고 열광적인 부관 쇤먼이 런던에 머물면서 그를 위해 일을 꾸려나가는 편이 무척이나 편리했다. 그래서 쇤먼은 러셀이라는 술탄 밑에서 장관 역할을 했고, 그의 통치는 6년간 지속됐다. 그는 러셀이 1961년 9월에 처포됐을 때 러셀 곁에 있었고, 따라서 감옥에도 동행했다. 쇤먼이 11월에 석방됐을 때 내무성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외국인이러면서 그를 추방할 것을 제안했다. 유명한 진보인사 상당수가 쇤먼의 체류를 허가해 달라는 진정서에 서명을 했고, 정부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체르트코프가 톨스토이를 좌지우지한 것처럼 훗날 쇤먼이 러셀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 것처럼 보였을 때, 진정서에 서명을 한 진보 인사들은 자신들의 개입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옛 친구들은 가끔은 러셀과 통화하기도 힘들었다. 쇤먼이 전화를 받은 다음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약속만 했기 때문이었다. 쇤먼은 러셀이 ;에 기고했던 많은 편지와, 세계적인 사건들에 대한 논평을 담아 러셀의 이름으로 언론사로 보낸 성명서들의 진짜 저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쇤먼 자신도 대전콜걸 이런 믿음을 부추겼다. 그는 “1960년 이후 버트런드 러셀의 이름이 담긴 모든 중요한 정치적 발의안은 생각에서나 행동에서나 모두 나의 작품이었다.” 늙은 러셀이 “음흉한 젊은 혁명가에게 접수됐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진실”이라고 그는 말했다. ​쇤먼이 100인 위원회, 베트남전 전쟁 범죄 법정과 “버트런드 러셀 평화재단”의 창설에 상당한 정도로 개입한 것은 확실하다. 1960년대에 러셀의 런던 기지는 일종의 미니 외무성, 일종의 코믹한 정부 전복 계획 센터로 변해서, 중국의 모택동과 주은래, 러시아의 후르시초프,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에티오피아의 하일레셀라 시에, 키프로스의 마카리오스를 포함한 각국 정부의 수반들에게 편지와 전보를 끝없이 발송했다. 이런 서한이 길어질수록, 발송 빈도가 짖아지고 문장이 거칠어질수록 답장을 보내려는 상대편의 노력도 점점 줄어들었다. 국내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공개적인 논평도 내놨다. “프로퓨모 스캔들[1963년 영국의 육군 장관 프로퓨모가 콜걸과 혼외정사를 벌인 사건]이 심상치 않은 것은 내각이 관음증환자, 동성애자, 매춘부로 구성됐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사건이 심각한 것은 권력을 잡고 있는 이들이 사법부의 본분을 완전히 파괴했고, 증거를 꾸며냈으며, 증인을 협박햇고, 증거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결탁했으며, 심지어는 경찰이 살인을 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있어 신문들도 이런 난센스를 싣는 일을 중단했다. ​러셀과 접촉이 끊긴 옛 친구들은 이 모든 성명서의 저자는 쇤먼이라고 추측했다. 쇤먼이 많은 것을 썼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그 성명서에는 새로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러셀은 별로 대단한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글을 쓰는 것을 곧잘 허용했다. 1941년에 시드니 훅이 버트란드 러셀이 쓴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 대해 불평을 하자, 러셀은 원고료로 50달러를 받았다고 인정했다. 글을 쓴 사람은 러셀의 아내였고, 러셀은 원고에 서명만 했을 뿐이었다. 쇤먼의 작품들이 자기 비서의 관점처럼 과격하기만 한 러셀의 관점을 심각하게 잘못 전달했다는 증거는 없다. 러셀의 아카이브는 러셀이 쓴 글의 몇몇 문장을 쇤먼이 직접 수정하고 강경하게 고쳤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것은 러셀 자신이 직접 구술했던 것일지도 대전콜걸 모른다(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성명서가 이런 경우인 듯하다). 이성이 아닌 감정이 주도권을 잡으면, 러셀은 항상 미리 준비된 온건한 문구에서 멀리 벗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기에 러셀의 이름 아래 발표된 많은 성명서들이 유치해 보인다면, 1960년대가 유치한 시절이었고 러셀이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는, 특히 말년에 유치한 분통을 터뜨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노동당 당원증을 찢어 버리는 특별 의식을 거행했다. 당시 수상인 해럴드 윌슨이 주최한 리셉션에서 윌슨이 “러셀 경”이라고 부르면서 팔을 벌리고 다가왔을 때, 연로한 백작은 여봐란 듯이 손을 주머니에 꽂고만 있었다. 러셀의 전기 작가인 로널드 클라크가 정확하게 주장했듯이, 당시의 일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러셀은 결코 노망이 들지 않았다. 그는 쇤먼이 제멋대로 날뛸 수 있게 놔뒀지만,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통제권만큼은 확고히 붙들고 있었다. ​쉰먼이 더 이상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러셀은 굉장히 매정하게 행동했다. 러셀은 쇤먼의 극단주의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쏟아진 대중의 이목을 빼앗기는 것도 싫어했다. 쇤먼은 “러셀 백작의 개인적 대리인” 자격으로 해외에 여러 차례 출장을 다녔는데, 이런 출장은 말썽으로 이어졌다. 중국에서 쇤먼은 대중에게 정부에 불복종하라고 권고했고, 노발대발한 주은래는 러셀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이보다 더 잘 알려진 쇤먼의 비행은 1965년 7월에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 평화 대회에서 행해졌다. 러셀은 주최자로부터 성난 전보를 받았다. “선생님의 개인적 대리인의 연설이 소동을 불러일으켰음. 청중들이 강하게 반발했음. 평화 대회에 대한 엄청난 도발이었음. 재단은 망신을 당했음. 선생님이 쇤먼과 그의 연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필수적임. 이만 인사드림.” 1966-67년에는 베트남전 전쟁 범죄 법정을 둘러싸고 막전과 막후에서 오랜 다툼이 있었다. 1969년에 97세인 러셀은 쇤먼에게 더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보고는 전격적으로 쇤먼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7월 9일에 러셀은 자신의 유언 집행인이자 수탁자였던 쇤먼을 유언장에서 지워 버렸고, 같은 달 중순에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 두 달 후에 러셀은 버드런드 러셀 평화 재단의 임원 명단에서도 쇤먼의 대전콜걸 이름을 지웠다. 11월에 그는 넷째 아내 에디스에게 쇤먼과 자신의 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7,000단어짜리 성명서를 구술했다. 에디스가 타이핑하고 러셀은 각 장마다 이니셜로 서명을 했다. 다른 타자기로 타이핑하고 러셀이 서명한 편지가 덧붙여졌다. 휘그당원 특유의 겸손한 척하면서도 거만한 성명서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랠프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 나는 진실로 랠프가 생각했던 것만큼 랠프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결코 없었다. 나는 옛날에는 그를 좋아햇다. 그렇지만 나는 한번도 그를 유능하거나 중요한 사람이라거나 영향력 있는 개인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이것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아내를 내팽개칠 때 러셀이 보여 준 특징 중 일부였다. ​러셀이 그토록 오랫동안 쇤먼을 데리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러셀이 싫어햇던 기금 모금에 쇤먼이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항상 돈을 열망했다. 돈을 버는 것도, 쓰는 것도, 공정하게 말하자면 남에게 주는 것도 열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전쟁 무기를 만드는 기계 회사의 주식 3,000파운드어치를 보유하고 싶지 않았던 러셀은 물려받은 그 주식을 가난에 시달리는 T. S. 엘리엇에게 넘겨줬다. 러셀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몇 년 뒤 전쟁이 끝난 후 더 이상 가난뱅이가 아니었던 (엘리엇은) 주식을 나에게 되돌려 줬다.” 러셀은 여성들에게 사치서런 선물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는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훅은 러셀의 가장 큰 죄가 허영심과 탐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러셀이 미국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위해서 쓰레기 같은 글들을 쓰거나, 아무런 관심도 없는 책의 추천서를 써 준 적이 많다고 밝혔다. 러셀은 우선 자신에게 1년에 2,000파운드밖에 지불하지 않는 학교를 비난했고, 그 다음으로 아내를 비난하는 것으로 변명을 했다. 그는 셋째 아내가 낭비벽이 있다고 주장했고, 두 사람이 이혼한 후에는 1950년에 노벨상 상금으로 받은 1만 1000파운드 중에서 1만 파운드가 그녀에게 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시에 두 건의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벌어야 했고 돈을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는 돈을 많이 번다는 생각 자체도 즐겼다. 그래서 그는 대전콜걸 작은 노트에 몰입했다. 크로셰이-윌리엄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지금 그가 벌고 있는 수입의 내역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부추기는 것을 그는 즐겼다.” 1960년에 상금 5,000파운드를 세금 없이 받을 수 있는 덴마크이 소닝상을 수상해쓸 때, 러셀은 특히 기뻐했다. “게다가 세금이 없어.” 그는 기뻐 날뛰었다. “순수입이야!” 그는 크로셰이-윌리엄스에게 덴마크에서는 이틀만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서 상금을 받고는 곧장 돌아올 거야.”​쇤먼은 자신이 뛰어난 재무 장관임을 입증했다. 그는 러셀의 편지에 이렇게 적힌 메모지를 넣었다. “귀하께서 평화를 위한 버트런드 러셀 경의 노력이 가치가 있다고 믿으신다면, 이 운동을 재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에도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비서가 이 메모를 집어넣는다는 것을 러셀 경은 전혀 모르십니다.” 쇤먼은 러셀의 사인을 요청한 사람들에게 3파운드를 받았다(나중에는 2파운드로 떨어졌다). 저널리스트들은 인터뷰할 특권을 얻으려면 150파운드를 내라는 요구를 받았다. 쇤먼의 미국식 기금 모집에 항의하는 편지를 꽤 받았기 때문에 러셀은 이런 징수 행위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러셀은 그 행위를 계속 허용했다. 러셀은 쇤먼이 행한 가장 큰 책략 두 가지에도 찬성한 듯하다. 쇤먼은 러셀의 보수적인 출판업자 스탠리 언윈 경의 충고를 거스르면서까지 러셀 자서전의 미국 판권을 경매에 붙였다. (그 시절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업 수단이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액수인 20만 달러까지 경매 액수를 끌어올렸다. 그는 러셀이 브레히트처럼 광대한 개인 아카이브를 축적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용했다. 동시대인 처칠과 마찬가지로, 유명 인사에게서 받은 편지의 금전적 가치를 인식한 최초의 인물 중 한 사람인 러셀은 그가 받은 편지들을(그가 보낸 편지들의 사본과 함께) 모두 보관했다. 1960년대 무렵에는 문건이 25만 건에 달해서 “영국 내에서 이런 종류로는 제일 중요한 단일 아카이브”로 불렸다. 홍보의 귀재 쇤먼은 중무장한 자동차 두 대로 아카이브를 런던으로 수송하고 대대적인 선전을 한껏 펼친 후에 온타리오 해밀턴 소재 맥마스터대학에 25만 달러를 받고 아카이브를 팔아넘겼다. 평화 재단 설립은 쇤먼의 최고작이었다. 대서양 평화 재단과 유사한 성격을 띤 재단 덕분에 쇤먼은 세금을 면제받는 관대한 지위를 획득했다. 러셀은 대전콜걸 무관심하다는 듯 이렇게 적었다. “내 의지와는 달리 내 동료들은 재단에 내 이름이 반드시 붙어야만 한다고 강권했다.” 말년에 러셀은 그가 좋아하는 합리적, 비합리적 주장을 위해 많은 돈을 투입할 수 있었고, 상당한 수입을 누릴 수 있었으며,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최소한의 세금만 내게 되었다. 이 독창적인 조직을 창립한 쇤먼은 러셀에게 허망하게 버림받았다. 러셀이 친구 윌리엄스-엘리스처럼 부자이면서 사회주의자였다는 비난(두 사람 다 어째서 그들의 돈을 처분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서, 러셀은 상투적인 대답을 했다. “당신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군. 클러프 윌리엄스-엘리스와 나는 사회주의자야. 우리는 기독교도인 양 가장하지는 않아.”​독선적인 진보주의와 특권층의 양쪽 세계에서 최선의 것만을 뽑아내는 능력은 많은 지도적 지식인들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다. 그런데 이런 능력면에서는 어느 누구도 버트런드 러셀을 능가하지 못했다. 러셀은 가문과 명성, 인맥과 작위가 그에게 안겨주는 혜택을 노골적으로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런 혜택이 주어질 때는 결코 거절하지 않았다. 1918년에 보우 거리의 치안 판사가 그에게 선고한 (중노동을 하는) 2등 교도소 6개월 형은 항소에 따라 1등 교도소로 바뀌었다. 재판장은 이렇게 공표했다. “대단히 탁월한 인재인 러셀 씨를 재능을 한껏 펴지 못하도록 감금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입니다.” 러셀이 자서전에서 한 설명에 따르면, 그런 관대한 처분은 당시 외무 장관으로 있던 동료 철학자 덕분이었다. “아서 밸푸어의 개입으로 나는 1등 교도소로 이감됐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감옥에 있을 때 반전주의 선전 선동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마음껏 읽고 쓸 수 있었다. 나는 감옥이 여러 가지 면에서 꽤나 유쾌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브릭스턴 교도소에서 같은 최신 서적들을 구해서 읽을 수 있었는데, 그는 이 책을 읽고는 “너무나 크게 웃어대는 바람에, 간수들이 내 감옥에 와서는 감옥이란 징벌을 받는 장소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E. D. 모렐처럼 인맥이 약했던 동료 반전주의자들은 2등 교도소에서 건강을 해쳤다. ​러셀은 사소한 특혜들도 즐겼다. 쇤먼은 공공 도서관이 러셀에게 별도의 스릴러 쿼터를 배정하도록 일을 처리했다. 당대의 다른 케임브리지 지식인들이 대전콜걸 많이 그랬듯, 러셀은 탐정 소설을 엄청나게 탐독했다(러셀의 오랜 동료 J. E. 맥타가트는 1주일에 30권을 읽었다). 종전 직후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에 유명한 스카치 증류소가 “러셀 백작”이라는 마크가 찍힌 위스키 상자를 매달 그에게 보냈을 때에도 러셀은 항의하지 않았다.(하긴 어느 누가 항의를 하겠는가). 러셀을 만나는 사람들은 항상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러셀의 말과 행동 때문에 그의 출신 성분을 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첫 아내를 “우리 할머니라면 숙녀라고 부르지 않았을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스물한 살 생일은 “내가 성년이 된” 날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가 중산 계급이라고 부른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즐겼다. 어느 여배우와 그의 에이전트가 러셀의 응접실에서 러셀을 흉내 내자 너무나 화가 난 러셀은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그는 메리트 훈장을 너무나 받고 싶어 했다. 그는 에딩턴이나 화이트헤드 같은 열등한 사람이 그보다 앞서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따라서 조지 6세가 마침내 훈장을 수여했을 때, 그는 너무나 기뻐했다. 그가 자신의 작위를 결코 활용하지 않았다는 좌익의 믿음은 신화에 불과하다. 작위를 받았다는 사실만을 즐거워했던 셋째 아내와 달리, 러셀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면 언제나 작위를 실용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필요할 때면 항상 백작이었다. 그렇지 않을 때면, 어느 정도까지는 붙임성 있는 친구였다. 그를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논리 문제를 보자면, 그 역시도 필요한 경우에만 들먹거려졌다.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당시, 러셀은 다른 많은 문인과 더불어 항의 서한에 서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 서한을 ;을 인쇄하기 위한 인쇄기 앞에 있는 나에게까지 다다랐다. 러셀은 그 편지를 기획한 사람이 자기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내가 고의로 그런 짓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고, 편지가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자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어쨌든 백작님이 편지에 서명하기로 동의했다면, 백작님 이름이 맨 앞에 붙었다고 해서 불평을 하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건 논리적이지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시시한 일이야!” 러셀은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쾅 하고 전화를 끊어 대전콜걸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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