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인쇄하기

Home › 커뮤니티 › Q&A

스데반의 연설행 7:2-53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기능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HELLO
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4-09-06 13:11

본문

WBC247 재천(개신대학원대학교) 초록 거의 전체가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구성된 스데반의 연설(행 7:2-53)은 사도행전의 여타 연설 또는 설교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형식과 주제 그리고 문학적 기능을 갖는다. 먼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연설의 기본 소재라는 사실 자체로 인해 스데반이 율법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 기초하여 더욱 온전하고 충실한 하나님 이해, 공동체 이해가 있음이 밝혀진다. 반면 스데반의 성전에 대한 견해는 좀 더 직설적이며 비판적이다. 그의 반-성전주의의 기본논리는 가시적 구조물로서의 성전에 대한 집착은 곧 “손으로 만든 것,” 즉 우상에 대한 이끌림의 발로하는 점이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변증과 선포를 전달한다. 모범적 신앙을 가졌던 여러 조상 중에서도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 또는 “그 의인,” 즉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였다. 모세는 메시아적 기능인 “지도자”와 “속량하는 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복음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 있어서도 이제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벗어나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담겨 있다. 이러한 신학적 주제와 문학적 구조를 전달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취한 형식과 내용은 당대의 해석적 전통에 기댄 바가 크다. 칠십인 경의 여섯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다시 이야기하는 데 사용되는 독특한 관점과 방식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전통에 뿌리를 둔 사도행전 7장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스데반으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제자공동체의 신학적 정당성을 변호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하며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기대하게 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I. 서론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부활 이후 예수의 행적 중에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동행하시며 나눈 대화가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더디 믿음을 책망하시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5-27). ‘누가’에게 있어서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구약성경, 즉 이스라엘의 이야기로부터 증언될 수 있었고 또 증언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처럼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주어야만 했다. ‘누가’는 그의 2부작을 통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밑그림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간다. 구약성경으로부터 직접 인용된 다수의 구절 외에도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여러 부분을 떠올리게 많든 수많은 암시와 울림이 누가-행전 전반에 걸쳐 탐지된다. 특히, 사도행전에는 더욱 명시적인 형태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하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그 하나는 예루살렘의 제자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스데반의 긴 변증 연설이고(7:2-53), 또 다른 하나는 안디옥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이제 막 이방 세계로 파송된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행한 설교이다(13:16-41). 필자는 여기서 그 중 스데반의 연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후자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와 두 연설에 대한 비교분석은 다음 과제로 남겨둘 것이다. 스데반의 연설에서 이스라엘 이야기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먼저 이 연설이 주제 면에서 세 가지 요소, 즉 자기변호와 복음 설교 그리고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이 주제들은 그것을 담기에 적합한 문학적 구조 속에서 제시되어야 하는데, 이는 연설을 둘러싼 문맥 안에서의 이 연설의 역할과 연설 자체의 문학적 구조, 둘 다를 말하는 것이며 필자는 연설의 주제와 함께 그 구조적 특징을 분석할 것이다. 아울러 연설의 특정한 신학적 주제와 문학적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재해석, 재구성되었음을 논증할 것이다. 이러한 재해석과 재구성이 스데반 혹은 누가의 기발한 고안의 결과라기보다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승사적인 궤적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필자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나의 문학적 기법(literary topos)으로 사용한 칠십인 경의 몇몇 본문을 추적해 볼 것이다. 이것을 통해 스데반 연설에서 이스라엘 이야기가 제공하는 신학적, 문학적 특성이 좀 더 분명하게 규명될 것이다. II. 스데반의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기능 1. 사도행전 7장에서 이스라엘 이야기의 기능에 대한 그간의 연구들 스데반의 연설은 주석가들에게 하나의 퍼즐로 여겨져 왔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의 연설들에 대한 연구는 그간 심도있게 진행되어왔고,1) 특히 역사 기술(historiography)에서의 연설 성격과 기능에 대해서는 투키디데스의 유명한 진술 이래로 충분한 토론이 있어왔다.2) 그런데도 스데반의 연설만큼은 그 성격 규정에 있어서 견해의 차이가 크다. 디벨리우스(M. Dibelius) 이래로 많은 연구자는 연설 대부분의 내용이 연설이 놓여진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와 무관하다고 보았다.3) 즉, 정황상 스데반에게 기대된 대답은 자신에게 부과된 혐의에 대한 ‘자기변호’(apologia)인데 반해, 정작 연설 자체는 그러한 취지를 담고 있는 진술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4) 연설에 바로 이어지는 사건은 스데반의 순교이지만, 그렇다고 이 연설을 순교의 상황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순교 설교로 보기도 어렵다.5) 위더링턴(B. Witherington III)은 비록 이 연설이 자기변호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보다 넓은 문맥과 잘 들어맞는다고 본다. 변호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연설이며, 법정적 연설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수사학적 기법이 사용되었다고 이해한다.6) 물론, 이 문제는 연설이 내러티브 상의 화자인 스데반에게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질문과 직결된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비평적 학자가 연설이 누가의 순수한 창작물이거나 적어도 스데반이 아닌 어떤 독립적인 출처에서 얻은 자료를 각색했다고 추측하면서도7) 정작 이 연설이 전후 문맥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관찰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누가’는 이 연설을 작성하거나 각색할 때 지극히 부주의했거나 매우 무능한 역사 기술가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본문의 자료와 편집의 문제는 비록 본 고의 주제-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스데반의 연설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와 관련은 있지만, 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못한다. 사도행전 7장의 이스라엘 이야기가 신명기적(deutronomistic)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관찰 위에서 그 일차적 기능이 교훈적이라고 보기도 한다.8) 이는 우리가 III장에서 다루게 될 구약성경의 여러 본문과의 관련성을 고찰할 때 상세히 다룰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전형적인 신명기 사관과 스데반의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동일하지 않다. 성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적 태도와 그 근거 그리고 “그 의인”이신 메시아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죄악은 스데반의 연설에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필자는 연설이 놓여 있는 문맥과 이스라엘 이야기의 내적 구조 그리고 그것이 전달하는 신학적 강조점들에 주목하면서 과연 이 연설의 성격은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가지는 기능은 무엇인지를 규명해볼 것이다. 2. 스데반 연설의 문학적 구조와 이스라엘의 이야기 가. 더욱 넓은 문맥 안에서 스데반의 연설의 위치 스데반의 연설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길 뿐 아니라 전체 내러티브의 전개상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지점에 놓여 있다.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를 대별하자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이 동심원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에 따라 세 개의 큰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1-7장[예루살렘]8-12장[유대와 사마리아]13-28장[땅끝]), 스데반의 연설은 첫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두 번째 단락으로 전환하는 지점에 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연설이 이러한 문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제자공동체의 WBC247 사역을 요약하고 평가하는 데 활용되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계기로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는 초기부터 외부로부터의 핍박에 직면했다. 사도들은 두 번에 걸쳐서 산헤드린 앞에서 자신들의 무죄를 호소하고 복음을 변호했었다(4:1-225:17-32). 사도들처럼 스데반도 복음을 전하다가 고소를 당해서 산헤드린 앞에 세워졌다. 이 두 변론에서 사도들은 죽었던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베푸는 구세주가 되셨음을 주장하고 예수를 죽인 공회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이 세 번째 변론은 이전 두 변론과는 달리 직접적인 기독론적 진술들보다는 성경에 기초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역사를 개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 분의 현재적 역사가 확고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며 이스라엘의 집단적 경험 속에 담긴 하나님 언약의 성취라는 사상은 이미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2:22- 36)와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3:13-26)를 통해 반복적으로 언급되었었다. 따라서 스데반 설교 속의 이스라엘 이야기는 사도행전 1~6장까지 에서 묘사된 예루살렘 제자공동체의 신학적 토대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전통 속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사건에 비추어 그 전통을 비판함으로써 성전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예루살렘의 엘리트 그룹과 긴장 관계 속에 놓이게 된 제자공동체의 사상적 면모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바로 스데반 설교의 이스라엘 이야기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다음 단계 복음 사역의 무대인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을 미리 내다보게 한다. 연설에 이어 스데반은 순교하게 되고, 그의 죽음을 통해 예루살렘에 집중되었던 증인공동체가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흩어진 제자들은 이미 두 번째 단락에서부터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였고(이디오피아의 관리[8:26-39]고넬료 가정[10장]안디옥의 헬라인들[11:20-21]), 이것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 “땅끝”까지 진행되었다. 결국, 이방인 선교는 누가-행전의 핵심 주제이며, 이는 바울의 사역에 대한 부분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를 다룬 1~6장에서부터 이미 암시되었다.9) 이러한 암시를 이어받아 복음의 한계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될 수 없음을 스데반의 설교는 확인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이 아닌 이방지역(메소포타미아, 애굽,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나타남과 계시의 사건들을 선별하여 보도하며, 오히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단언을 담고 있다.10) 이 연설에서처럼 전체 내러티브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사용하는 예들이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도 더러 발견된다. 위더링턴은 이스라엘 이야기 자체의 형식적, 내용적 특성보다는 그러한 과거 역사의 요약이 고대의 역사기술(historiography) 문학에서 특정한 기능을 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헤로도투스의 글에 전장에서 맞서고 있는 양편이 각각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소재 삼아 전의를 북돋운다든지, 요세푸스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